사형에 처할 뻔한 여인
알몸으로 무죄를 입증하다?
기원전 4세기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 프리네(Phryne)라는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당대 최고의 매춘부가 있었다. 지금이야 매춘부라고 하면 남자에게 몸을 파는 저급한 창녀를 떠올리겠지만, 이 당시에는 매춘부에도 등급이 정해져 있었다. 그 중에 최하급은 포르노이(Pornoi), 최상급을 헤타이라(Heteira)라 불렀는데, 프리네는 이 중 헤타이라에 속했다. 그녀는 헤타이라 중에서도 최상급, 그러니까 최고위층을 담당하는 매춘부였기 때문에 상대방과 대화가 통하려면 미모뿐 아니라 정치, 철학, 예술 등 교양을 갖춰야 당시의 유명한 정치가, 철학자, 장군 등을 모실 수 있었다.
프리네는 최고였던만큼 아무에게나 사랑을 주지 않았고, 이로 인해 그녀에게 거절당한 고관대작 에우티아스의 눈먼 질투로 인해 신성모독죄라는 죄명으로 법정에 서게 되었다. 그녀가 아프로디테의 모델이 되어 알몸으로 나선 것을 문제삼은 것이다.
그 당시, 그리스에서는 신성모독죄를 엄중히 다뤘기 때문에 이 죄로 법정에 선다는 것은 곧 사형을 의미했다. 그녀의 애인이자 유능한 변호사였던 히페리데스가 그녀의 변호를 맡았지만, 그가 아무리 재판관들 앞에서 열변을 토해도 분위기는 절망적으로 변해갔다. 논리로서 재판관들을 설득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히페리데스는 한 가지 모험을 선택한다.
그것은 바로 재판관들 앞에서 프리네의 옷을 벗기는 것. 즉, 재판관들에게 감정으로 호소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그녀의 옷을 벗기고는 "여신상을 빚을 만큼 아름다운 이 여인을 죽여야겠는가?"라고 외쳤다. 재판관들은 프리네의 눈부시고 하얀 아름다운 몸에 할 말을 잃어버린 채 "저 아름다움은 신의 의지로 받아들여야 한다. 따라서 그녀의 앞에선 사람이 만들어낸 법은 효력을 발휘할 수 없다. 그러므로 무죄를 선고한다."라는 판결을 내리게 된다.
결국 프리네의 아름다움 앞에 무릎을 꿇게 된 것이고 미모로 인해 무죄판결을 내린 최초의 사례라 할 수 있다. 당시 최고 지식인들이라 불리는 결정권자들의 이런 판결은 어느 시대를 찾아봐도 쉽게 찾을 수 없는 진귀한 기록이다.
국가의 원수집안과 결혼한다고?
하지만 예쁘다면 괜찮습니다
조제핀 공녀는 1823년 스웨덴의 왕위계승자였던 오스카르 1세와 결혼하기 위해 스웨덴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의 결혼 소식을 들은 스웨덴 국민들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큰 분노를 일으켰다. 그 이유는 그녀가 나폴레옹의 손녀이기 때문.
당시 나폴레옹은 라이프치히 전투 이후로 스웨덴과는 원수지간이나 다름없었다. 우리나라로 치면 조선의 공주가 일본 왜놈과 결혼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셈이다. 스웨덴 국민들은 반(反)나폴레옹 정서가 강했기 때문에 나폴레옹의 집안과 결혼하는 것을 좋게 볼 수 없었다. 또한 그녀는 가톨릭 교도였지만 스웨덴은 신교의 나라라는 점에서 그녀는 더 더욱 환영받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가 스웨덴에 도착해서 스웨덴 국민들과 직접 만나게 되자 이러한 분노들은 순식간에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녀의 외모가 너무나 빼어났기 때문. 그리고 그녀는 정치에도 관심이 많았으며 빼어난 외모만큼 뛰어난 예술 감각과 후원으로 스웨덴 국민들의 마음을 점점 사로잡아 갔으며, 후에 그녀는 온 국민의 사랑을 받는 왕비가 된다.
중독성이 강한 미녀 양귀비
후대까지 전해지는 전설의 미모
중국 당나라 현종의 후궁이었던 양귀비는 마약 이름에 붙일만큼 치명적인 미인으로 손꼽힌다. 그녀는 해어화(解語花, 말을 알아듣는 꽃)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얼굴 뿐만 아니라 지적인 측면에서도 우수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런 양귀비가 죽은 후 그녀의 무덤은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돌무덤으로 뒤덮여 있는데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그녀의 무덤 또한 처음에는 흙으로 만들어진 무덤이었다.
양귀비가 서른 여덟의 나이로 죽게 되고 한참의 세월이 흘렀을 때 그녀의 무덤에 한 여인이 찾아와 울었다. "당신은 그리도 미인이라 수많은 남자들의 마음을 홀렸는데 내 신세는 도대체 무엇이냐." 그녀는 얼굴이 너무 못생겨 시집도 못가고 매번 사람들에게 외면당하자 양귀비의 무덤을 찾아와 무덤에 얼굴을 박고 울었다.
그리고 다음 날,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양귀비의 무덤에서 흙범벅으로 울었던 그녀의 피부가 양귀비의 피부처럼 아름다워 졌던 것. 이 소문은 급속도로 퍼져 나갔고 양귀비의 무덤에 있는 흙을 바르면 미인이 된다고 사람들이 믿게 되었다.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양귀비의 무덤에 몰려와 얼굴에 흙을 바르기 시작했다. 남자들은 자신의 아내를 위해, 여자들은 자기가 바르기 위해 무덤의 흙은 계속해서 사라져갔고, 없어진 흙을 아무리 메워도 다음 날이면 다시 사람들이 몰려와 무덤의 흙이 남아나는 일이 없었다.
결국 이를 보다 못한 마을의 태수가 사람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 명을 내려 그녀의 무덤을 단단한 돌로 덮어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 당시 사람들이 양귀비란 존재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충분히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양귀비 무덤의 흙은 일종의 머드팩 효과는 아니었을까.
슬퍼서 시 한번 읊었을 뿐인데
파직당한 조선의 관료
조선 최고의 기생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 황진이.
그녀가 죽은 후 조선시대 관료 겸 문장가로 유명했던 임제는 종5품 평안도사에 임명되어 평양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평양으로 가기 위해서는 개성을 통과해야 했는데, 그 도로변에는 관기 황진이의 무덤이 있었다. 황진이가 죽은 지 몇십년 되는 시점에 임제가 무덤앞에 다다르게 된 것이다. 임제는 천하 명기인 황진이가 떠올라 그녀의 무덤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문장가였던 그는 즉석에서 그녀에 대한 추모 시를 만들어 제사를 지냈다.
푸른 수풀 우거진 골짜기에 자는가 누웠는가
어여쁜 얼굴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구나
잔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것을 서러워 하노라
그러나 임제가 지낸 제사에 대한 소식은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관료가 관의 기생 무덤에 제사를 올리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비판이 쏟아져 나왔다. 결국 그는 평양에 도착하기도 전에 관직에서 파직당하고 만다.
시를 하나 읊어줬을 뿐인데, 평생 직장을 잃은 임제.
'쓸만한 정보'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게임회사만 만족하는 요즘 트렌드, 게임 속 PC 넣기 (0) | 2020.06.30 |
---|---|
퍼거슨 감독의 패배?! SNS의 순기능이 되는 사건들 (0) | 2020.06.25 |
잔인할수록 맛있는 요리들? 악마도 기겁하는 비윤리적인 음식들 (0) | 2020.06.25 |
냉혹한 스포츠계에서 길이 남을 명언 (0) | 2020.06.23 |
아디다스, 이케아, 아프리카TV등 기업-상품 이름에 담긴 의미 (2) (0) | 2020.06.16 |
댓글